[최근댓글] :
최종편집일 :
아이디 : 비밀번호 : 현재 접속자: 31명, (손님:31명, 회원:0명, 로그인:0명)  
  홈 > 안보광장 >호국인
   
한국전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작성자 想像超越
작성일 2012-10-28 (일) 12:13
분 류 한국전쟁
자료출처 재테크의 달인되기
추천: 0  조회: 2813       

 
한국전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이 글은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毛岸英)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
-----------------------------------

동기는 현재 국회에서 추진되는 법안인 특권 집단에 대한
더 강화된 병역관리를 위한 법안이 일부 비토세력에 의해서
반대 되고 있다는 말을 들고 한국전 이래 일부 지도층에게
체질화되어 버린 국방의 의무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엔군 사령관을 했던 밴프리트 대장의 아들이 미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서 출격을
했다가 전사했고 북쪽의 중공군의
최고 사령관인 모택동의 아들이
폭격에 전사를 하고 북한 땅에 묻혔다.

나는 이중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모택동 아들의 전사를 소개하여 한국 일부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브리제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하고 싶었었다.
※노블리시 오브리제(noblesse oblige) -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인
  솔선수범의 사회적 책임감

그래서 다 써놓고 보니 너무 모택동을 미화한 듯했다.
그가 중국 통일 전까지 해 놓은 기적 같은 업적들은 나도 감탄해
마지않지만 그가 한국 전쟁 때 개입하여 통일을 방해한 것과 그 뒤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의 대 실수, 그리고 그의 문란한 사생활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대로 포스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힘들여 쓴 글을  버리기도 아까워 대신 모택동의
두 번째 부인 양개혜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들의 일화를
바꿔서 글을 다시 꾸며서 포스팅하기로 한다.

풍운아 모택동은 결혼을 여러 번 했었다.
중국 호남성 상담현 소산 촌에서 그가 열네 살 때 부모가 시킨
첫 결혼은 그가 신부 꼴을 보려고 하지를 않아서 자연히 깨졌다.
이 첫 결혼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장사(長沙)사범학교 재학 중에 존경했던 스승 양창제 교수의
딸 양개혜(楊開慧)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양개혜와 안영 안청 두 아들
-----------------------

그 뒤 다시 결혼한 하자진(賀士珍)이나 강청(江?)등과의 결혼 생활에서
생긴 자식들도 있었지만 양개혜와의 사이에 낳은 기구한 운명의
세 아들들을 삶이 이 글의 주제가 된다.

그는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둔다.
첫째가 모안영(毛岸英), 둘째가 모안영(毛岸靑),
셋째가 모안룡(毛岸龍)이다.
특기 할 것은 미국과 그렇게 치열하게 대결했던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이 장사에 있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병원에서 탄생했었다는 사실이다.

모택동은 1927년 장사 폭동에 주도하러 집을 떠남으로서
양개혜와 영원한 이별을 한다.
초대 극소수의 여자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양개혜는
결혼 10년 뒤인 1930년 호남성 군벌 하건에게 체포되었다.

양개혜는 교도소에서 어린 모안영을 데리고 수감 생활을 했다.
그 녀는 모진 고문을 받고 전향을 강요받다가
1930년 11월 14일 처형되고 모안영은 석방되었다.

아들 세 명은 양개혜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가 보육했다.
그 때 모택동은 정강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아들 삼형제는 상해로 보내져 그곳 공산당 비밀 조직에서
기르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 조직이 발각되어 박살나자 그들 형제는 동건오라는
가난한 당원에게 맡겨졌다.
더구나 연안으로 부터의 송금도 장기간 끊겨
삼형제는 몇년간을 거지보다 나을 것 없이 고생하게 되었다.

이 기간 네 살짜리 셋째 아들 모안룡이 병에 걸려 죽었다.
더해서 둘째 모안청이 거리에서 구타당하여 정신 이상이 되었다.
1937년에야 이들은 겨우 연락이 되어져 소련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겨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과 교육같은 받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지 7년만의 일이었다.

큰 아들 모안영은 이런 어려운 악조건에서 제대로 자라
2차 세계 대전 때는 소련의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군에 입대하여 전차 소대장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하였다.

그와 동생 모안청은 1949년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귀국해서 아버지 모택동과 실로 20년 만에 해후하게 되었다.

모안영은 북경의 한 기계 공장의 당 부서기로 일하면서
유사제(劉思濟)라는 처녀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신혼
일 년 만에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입대하여 한국 전선으로 왔다.

모안영과 유사제
-----------------------------

모안영이 죽고 나서 모택동은 자기 친구에게 모안영이
한국 전선에서
전사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녀석(아들 모안영)을 파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명색이 중국 공산당 중앙 주석인 내게 자식이 있었다는
 처지를
생각해보게. 
 만약에 내 아들을 조선의 전선에 파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식들만을 전선에 파병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중국 인민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안영은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한국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일을 했었다.

팽덕회는 항미 원조 의용군(抗美 援朝 義勇軍)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 전선으로 파견한 중공군 주력이 압록강을 도강하던 날인
1950년 10월 19일 야간에 압록강 대교를 짚차를 타고 넘어와
그 날로 평북 운산 대유동에 비밀리에 미리 설치한 사령부로 들어갔다.

김 일성과 팽덕회  (오른쪽)
--------------------------------

이 때 모안영도 같이 사령부 요원들과 함께 동행해서 북한에
들어 온 듯하다.
대유동의 금광에는 미리 파견한 선견대가 설치한 사령부에
도착해서
자리를 미리 잡아 놓았었다.

이 금광은 구 한 말에 미국인이 개발했던 금광이고
노다지- No Touch- 라는 말이 생긴 곳이다.

광산 갱(坑)이 두 곳이 있고 광산 사무실들과 창고
같은 곳이 있는 곳이다.
여차하면 터널로 피난 할 수도 있고 근처 대동이라는 마을에
평양에서 도주해온 김일성 일당도 있어서 위치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미군과 대결하는 중공군의 최초 사령부가 자리 잡았으니 아이러니한
생각도 들고 미국인이 세운 병원에서 태어난 모안영이 미국인이
운영했던 운산 금광에서 미국인에 의해서 삶을 마감하는 이상한
운명을 가진 것이 기이하다. 

이곳에서 팽덕회는 북진하던 한미군의 전위에 한방 먹이는
그해 10월의 1차 작전을 기획하고 지휘했었다. 
한 달 간 바삐 지나간 1950년 11월 24일,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팽덕회 군의 작전 참모 정감여가 회상하는 바는 이 날 저녁을 먹은 후
사령부 상공으로 미군 F-80 슈팅 스타(SHOOTING STAR) 전투기
12기가 지나갔다.

F-80 shooting star
----------------------------- 

폭격을 끝내고 귀환하는 미 공군 편대겠지 했는데 그 중 한 기가
갑자기 뒤돌아와 사령부 상공을 어두워 질 때까지 한 시간이나
선회하며 살펴보다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 해보니 그 몇 십 분 전에 12기의 미군
제트 전투기에 의한 수풍 발전소에 폭격이 있었는데 그 편대가
폭격을 하고 귀환하다가 의심스러운 사령부를 발견하고
정찰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감여가 무엇을 잘못 보았거나 오해한 듯하다.
수풍 발전소는 이 때 폭격되지 않았었다.
그곳은 압록강 철교와 같이 조중(朝中)국경에 위치해있는
민감한 곳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수풍  발전소는 작은 수의 전투기로는 엄두도 나지 않는
거대 표적이었다.
수풍 발전소는 폭격대상에서 제외 되다가 1952년 6월에야
수백기의
미 공군 해군 해병대 항공대 공습으로 파괴가 되었다.

수풍 댐
---------------------------


그리고 작전을 끝낸 제트 전투기는 연료 소모가 많아서 한 시간이나
체공하며 한 목표를 정찰하지 못한다.

더해서 대편대로 출격에서 귀환 길에 한 기만 떨어져 나와 정찰하는
행위는 돌발 상황이 있지 않은 이상 극히 드문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도 한 기가 아니라 두 기가 같이 행동한다.

나의 생각에 앞에서 출격한 전투기의 폭격 성과를
확인하고 돌아오던 정찰기가 평소 수상하게 보이던 이곳을
집중 정찰을 한 듯하다.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따로 정찰 임무를 띄고 출격한 정찰기와
폭격을 끝내고
귀환하는 전투기가 서로 이 지역에서 교차했는지도
모른다.

이곳 사령부에는 북경의 모택동과 직접 교신 할 수 있는 강력한
무전기가 장비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일본군을 패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미군의
전자 정보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지도 모른다.

이런 전파를 쏘는 무전기는 위치 파악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파를 쏘는 위치를 이 지역으로 파악하고 범위를 축소하며
수색하다가 사령부가 발견 한 것 같다.

상공에 오랫동안 배회 했다는 말은 시각적 정찰보다 지상의 무전기가
다시 한 번 전파를 발신하는 것을 기다렸는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미 정찰기가 오랫동안 체공하며 정찰하는 것을 본 사령부
요원들은 불안했다.

그런 정찰기의 출현 뒤에는 반드시 폭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부사령관 홍학지(洪學智)의 주제로 대피 회의를 하고
만단의
준비를 했다가 다음날 새벽 4시부터 시작하여 사령부
전 부서가 전부 금광 갱 안과 주변의 방공호로 대피했다.

대범했던 팽덕회가 공습 가능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피를 하려고 하지 않아 사령부 요원들이 애를 먹었던 기록이 있다.

대피를 다 완료하고 나서 동이 떴고 이들 사령부 요원은 갱 안과
방공호에서 일을 계속했다.

과연 그날 1950년 11월 25일 오전 10시쯤 미 공군의
F80 12기가 저공으로 내습했다.
전투기들은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네이팜탄들을 사령부로 쓰던
건물들에
투하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이팜 탄은 팽덕회가 집무실과 작전실을 모두 명중하여 굉음과
함께
엄청난 불길을 쏟아냈다.

사령부 요원들이 대피하고 그대로 있었으면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네이팜 탄의 극단적인 고열을 내는 소이제가 담긴 액체 폭탄이다.

그 고열은 멀리서도 뜨거움을 느낄 정도로 높고 옷에 그 불붙은 액체가
붙으면 고무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태우는 독성적인 위력이 있다.
미 공군은 B-29 폭격기를 수 백 기를 동원하여 이 네이팜 폭탄들만
일본 도시들에 투하해서 엄청난 화재로 도시를 다 쓸어내다시피 하는
파괴 작전을 전개했었다.

사령부로 쓰던 목조 건물이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사령부 요원들이 살아났다는 안도의 느낌으로 가슴을 쓸 여유도 없이 
그 엄청난 불길 속에서 누가 몸에 불이 붙은 채로 튀어나왔다.

작전실 근무 작전 부부장 성보(成普)였다.
그는 불붙은 옷을 벗어 던지고 비명같이 고함을 질렀다.
“빨리 구출해 주세요. 모안영과 고서흔(高瑞欣)을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놀라서 불붙은 건물로 달려들었지만 너무 온도가 뜨거워서
감히 접근조차 할 수도 없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혈질인 팽덕회가 거의 발광하다시피하며
불속에 뛰어들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다한다.






 

네이팜 폭격 - 보시다시피 다른 폭격과 달리 불붙은 기름을 지상에
퍼부어 놓은 것 같은 특징을 보인다.
-----------------------------------------------------

팽덕회는 50년 대 말에 숙청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모택동이 아들을 죽게 만든 팽덕회에 대한 감정을
내심 감추고 있다가 표출했다고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불이 다 타고 나서야 두 사람의 유해를 수습 할 수 없었다.
모 안영의 유해는 까맣게 타서 숯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전투기의 폭음이 들리자 성보는 재빨리 건물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경험 없던 모안영과 고서흔은 책상 밑으로 대피했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만 왜 대피하지 않았나 하는 것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모안영의 유해는 대유동에 임시 가매장 되었다가 모택동의 지시로
북한 땅에 매장되었다.

그는 북한이 평남 부령군이라는 곳에 만든
‘지원군 혁명 열사 능원,이라는 곳에 안치되어있다.

북한의 지원군 혁명 열사능원에 안장된 모안영
-----------------------------------------------

문화 혁명 때 북한과 중국의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김일성은
속 좁은 짓을 했었다. 
홍위병이 김일성 욕을 해대자 격분한 그는 지원군 열사능원을
훼손하고 모안영 묘 앞에 만든 큰 기념비를 파괴했었다.
(나중에 대중 관계가 회복되자 다시 원상회복하기는 했다.)
지금 이곳은 북한 방문 중국 VIP들의 주요 방문 장소가 되어있다.

모택동은 며느리에게 신혼 일 년 만에 전선에 나간 아들의 죽음을
비밀로 지키다가 삼 년 만에 며느리에게 알려 주었다.
  0
3500
번호
분류 글제목 작성일
20
컬럼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유-민주-인권 투사는? 2015-06-24
19
한국전쟁 6ㆍ25전쟁영웅'으로 고태문(1929.1∼1952.11) 2013-11-06
18
한국전쟁 한국전쟁사 2012-10-28
17
한국전쟁 6.25전쟁당시 군 수뇌부의 첩자를 밝혀내야한다 2012-10-28
16
한국전쟁 한국전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2012-10-28
15
한국전쟁 6.25 전쟁 속의 미군들 2012-10-28
14
한국전쟁 한국전쟁 당시 사진들 2012-10-28
13
한국전쟁 주한미군기지관리 사령부 6.25전쟁 자료공개 2012-10-28
12
한국전쟁 한국전쟁 동영상 자료 2012-10-28
11
한국전쟁 6.25전쟁 발발 62주년 좌담회 - 6.25의 의미에 2012-05-26
10
컬럼 11에서 12까지 화랑전우 재회를 2012-05-24
9
사회이슈 [從北주사파 국회 입성] "6·25 남침이냐 북침이냐" 묻자 " 2012-05-16
8
북한 자유월남의 패망 2012-05-12
7
한국전쟁 "형, 온 줄도 몰랐는데… 죽지마, 죽지마요" 2012-04-18
6
북한 北로켓 발사, 대북결의안 위반 2012-03-18
5
북한 中, 北에 불량-가짜 식품 원조...80%가 쓰레기! 2012-03-18
12
화랑 안보광장
컬럼
한국전쟁
호국인
북한
사회이슈
미디어자료실


공지사항 자주하는 질문 질문 및 상담

신병교육대| 육군 | 육군훈련소 | 국방홍보원
관련사이트
전체방문 : 489,228명 오늘방문 : 164명 어제방문 : 189명 전체글등록 : 28,479
달리 정하지 않는 한,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http://www.11sadan.kr/. All rights reserved.